박혁종 / 본지 공동대표
2018년 12월이 떠나가고 있다. 마지막 생애를 붙잡고 나뭇가지에 매달려 버티고 있는 마지막 잎 새가 초조하고 불안한 것처럼, 지금 우리네 삶은 어떨까 싶다. 길거리에 간간히 낙엽이 뒹굴고 있다. 낙엽을 보고 낭만, 불안, 초조, 슬픔 멋을 느끼기보다 청소부의 고달픔을 먼저 생각하는 필자의 마음 모양이 중년이다.
지난 11월 4일 한국 영화계의 큰 별인 신성일 씨가 지구별을 떠났다. “인생은 연기야!” 이 말은 엄앵란 씨가 남편 신성일 씨의 시신을 입관한 후 한 말이다. ‘인생은 연기야’라는 표현에 언뜻 중국 당나라 때(唐代) 단성식(段成式: 803~863)이라는 사람이 엮은 이야기 책 유양잡조(酉陽雜俎)에 노생(盧生)이라는 사람에 관한 글이 생각났다.
노생의 염원은 큰 부자가 되는 것, 출세하여 명성을 얻는 것, 아름다운 아내를 맞이하는 것이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노생은 신선도를 닦는 여옹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노생은 여옹에게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간절히 애원했고, 묵묵히 노생의 말을 듣고 있던 여옹은 목침을 꺼내 주며 쉬기를 권하면서 “이보게. 이 목침을 베고 잠깐 눈을 붙이게. 그동안 나는 밥을 짓도록 하겠네” 그러자 의아해하던 노생은 혹시 이 목침이 도술을 부리는 물건인가 싶어 목침을 베고 누워 달게 잤다. 그런데 그 이후 노생의 인생이 바뀌었다.
노생이 응시한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황제의 치하를 받으며 큰 벼슬에 올랐고, 권력을 가지게 되자 재산은 절로 불어났으며, 부와 명성을 거머쥔 노생은 아름답고 현명한 아내를 얻어 총명하고 귀여운 자식들과 함께 영화로운 삶을 마음껏 누렸다.
‘도술로 얻은 이 행복이 또 다른 도술로 사라지지는 않을까?’하는 불안한 마음과 함께 살던 노생이 늙어 천수가 끝나는 순간 목소리가 들렸다. “밥이 다 익었으니 이제 일어나 밥 먹게나.” 노생이 눈을 번쩍 떠보니 여옹이 밥상을 들고 들어오고 있었다. 모두가 한바탕 꿈이었다.
80년 동안의 부귀영화가 잠깐 밥 짓는 사이에 꾸었던 꿈이었던 것이다. 그 어떤 거창한 비전이라도 스스로 쟁취하지 않으면 언제 사라져 버려도 미련을 가질 필요 없는, 그저 사라져 버릴 하룻밤 꿈에 불과한 것이다. 그 꿈을 움켜쥘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손뿐이다.
어느 날 문득 한 목숨 마치게 되면 마치 노생의 80여 평생 삶처럼 한 바탕 봄날 꿈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각자 그 80여 평생 자신이 쌓은 업을 가득 짊어지고 좋은 일,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은 거기에 걸 맞는 훌륭한 집안에 몸을 받아 새롭게 또 연기(煙氣, 緣起, 演技)를 시작할 것이다.
우리네 삶은 이와 같이 한바탕 일장춘몽과 다름없지만 이러한 도리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고 이러한 도리를 안다고 해도 머리로만 알고 실제 삶속에서 부딪치게 되면 이러한 도리를 다시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괴로워하거나 즐거워하며 그러한 삶에 집착하여 하루도 마음이 고요한 날이 없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 아닐까?
이렇게 허망하기 그지없고 무상하기 그지없는 연기(煙氣, 緣起, 演技) 놀음, 이제는 생각 좀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엄앵란 씨가 남편을 보내면서 참으로 명연기(演技))를 하고 있다. 우리는 걱정이 너무 많다. 걱정은 욕심이다. 다들 욕심의 노예가 돼서 산다. 여기서 인연을 맺었기에 내 식구 내 새끼라며 애지중지하지만 결국 다 똑같은 것 아닌가. 너무 욕심을 내지 말자.
인생의 부귀영화는 한바탕 꾼 꿈과 같이 덧없고 허무하다는 의미이다. 며칠 남지 않은 무술년(戊戌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사랑, 여러분 모두가 욕심을 버리고 남에게 작은 것이라도 베풀며 살기를 바란다.
지난 15일 현재 강원도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따르면 14일까지 모금액은 14억5천451만원으로 목표액 97억5천600만원 중 약 15%를 달성했다. 이는 지난겨울 같은 기간 모금액보다 14%가량 떨어진 수치다. ‘나눔으로 행복한 세상을 기대합니다’라는 슬로건이 올 해는 왜 이리 춥고 쓸쓸해 보이는지 안타까운 모습이다.
요즘 세상살이가 건조하다고 하나 이웃의 사정을 아주 모른 척하고 지내지는 말았으면 한다. 마음의 창은 늘 열려 있다. 때론 작고 때론 우주 보다 더욱 큰 창이지만 내 사정 이웃 사정을 자연스럽게 내비치자. 누구라도 외부와 완전히 차단하고 살아갈 수 없기에, 비록 안부를 직접 묻지는 못하지만, 미루어 짐작하고 서로 안도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