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시론] ‘남’이라는 글자에 ‘점’하나만 지우면….

인간은 누구나 행동에 앞서 먼저 그것이 긴요한지 아닌지 부터 판단한다. 그런데 그 긴요함을 판단하는 범위는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자기 자신이나 자기 가족에게 긴요한지 만을 따지지만, 어떤 이는 자신이 속한 사회와 국가, 심지어는 세계를 판단 범위에 두고 긴요한지 여부를 고민한다. 전자가 이기적인 긴요함이라면 후자는 이타적인 긴요함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전자를 좇는 사람이 많을수록 사회에는 갈등과 부패가 만연하고, 후자를 추구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사회는 안정되고 배려가 넘쳐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사회는 수많은 문제의 한 요인으로, ‘자기에게만 긴요한 일을 좇는 세태’가 아닌가 싶다. 인간은 ‘사람 사이’에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므로, 자기만을 위한 긴요함을 좇다 보면 도리어 자신의 의도와는 반대로 뼈저린 실패와 치욕을 맛보게 되는 것이 이치다.
오늘날 우리 또한 그렇게 믿고 싶고 그런 사회가 현실에서 구현되기를 바라지만, 예나 지금이나 이익에만 급급해서 이기적인 긴요함을 좇는 사람들에 의해 무너지고 파괴되고 있다,
타인의 긴요함을 배려하며 참된 긴요함을 제나 추구하며 지켜야 할 변하지 않는 도리의 교훈을 억겁의 세월과 역사로부터 학습되어 왔지만 점점 늘어나는 낙제점수에 사회공동체가 어찌 할 바 모르고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
2600여 년 전 성인은 이렇게 말했다. “나 홀로 존귀하다”라고. 얼핏 들으면 철저한 자기만의 이기주의로 해석되지만 이 말씀은 이기주의가 아니라, 세상 모든 중생들이 존귀하다는 생명존중의 선언이었다. 모든 중생 하나 하나가 모두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의미는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물질문명은 점점 발전하고 있지만 그에 따른 인간존엄과 인권은 따르지 못하는 현실에서 소중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사회문제로까지 비화되는 사건 사고는 대부분 나만이 존귀하다는 그릇된 생각에서 벌어진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소중하다는 인식은 지금의 우리 사회가 반드시 필요한 인생지침이어야 한다.
아이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며, 어버이는 자식이 함부로 대할 수 있는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 회사 임원이라고 직원들에게 막말하고 부당한 처우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이 재물이 조금 더 많다고 적게 가진 이에게 이른바 ‘갑질’을 하거나, 손님이 왕이니까 매장 직원을 ‘을’로 봐서도 안 된다. 성인의 가르침대로 우리는 모두 이 세상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너와 나, 우리가 전부 주인공이라면 갈등도 편견도 다툼도 전쟁도 벌어질 수 없다.
이 같은 진리를 명심하고 가슴속에 품고 산다면 우리 사회는 더욱 풍성하고 풍요로운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를 서로 존중하고 자비롭게 대하는 공동체로 만드는 일은 부모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자 해야 할 사명과도 같다 하겠다. 생명존중사상을 널리 퍼뜨리고 소외된 이웃을 살피는 우리조상들의 상도(�� 언제나 지켜야 할 변하지 않는 도리)정신을 이기를 기대한다.
나를 비롯한 내 가족 안정된 사회 속에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면, 더더욱 주변을 돌아보고 이웃을 살펴보는 진정한 마음이 선행돼야 한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평화롭고 온전할 때라야 내 가족, 내 삶에 평화와 행복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내가’ ‘네를’ 위해 작은 배려를 할 때, 또 다른 누군가도 ‘나를’ 위해 배려를 해줄 것이다.
좋은 예로 요즘 출근길 지하철에 타면 남성들은 일명 ‘투탕카멘 자세’를 취한다고 한다. 고대 이집트 왕 투탕카멘의 미라 모습처럼 차렷 자세에서 양손을 어깨 쪽으로 ‘엑스(X)’자로 교차시키고 시선은 상향 45도 정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콩나물시루처럼 북적대는 지하철에서는 의도치 않게 손이나 팔꿈치가 다른 사람과 닿는 경우가 생긴다면 성추행 같은 불필요한 오해를 예방하는 것이란다.
이는 성별에 관계없이 대부분 사람은 성범죄를 혐오하고 방지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으니 남성들이 각종 자구책을 ‘불편사항’이 아니라 ‘에티켓’으로 받아들이는 성숙한 문화가 생겨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암묵적 몸짓의 배려가 여성들을 배려한 것이라고 평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와 내 가족이 안전 화목 행복 평화를 원한다면 타인 또한 같은 마음이고 보면 나를 위하는 길은 타인을 위한 길이 아닐 수 없다.

 

박혁종 - 본지 논설위원
박혁종 – 본지 논설위원
< 저작권자 © 강원장애인복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