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불운아 단종대왕과 김삿갓
단종의 절규가 장릉 앞 자규루(子規樓)에 아직도 울리는 듯하다.
“달 밝은 밤 자규새 울면 / 시름 못 잊어 다락에 기대었네 / 네 울음 슬퍼 내 듣기 괴롭구나 / 네 소리 없으면 내 시름 없을 것을 / 이 세상 괴로운 이에게 말을 보내 권하노니 / 춘삼월 자규루엘랑 삼가 부디 오르지 마소” – 단종의 자규사
영월을 우리는 충절의 고장이라 부른다. 조선 왕조 제6대 임금인 단종대왕의 유배지였으며, 유일하게 강원도에 조선 왕릉이 있고 버려진 왕의 시신을 몰래 수습한 충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단종의 한 맺힌 역사와 마찬가지로 정순왕후의 한의 세월도 그때부터 시작된다. 단종3년 윤 6월11일 단종이 왕숙 수양대군에게 양위하고 상왕이 됨에 따라 정순왕후도 의덕왕대비로 올랐다. 그러나 세조3년(1457년) 6월 집현전 학자 성삼문, 박팽년 등과 유응부 등의 무신이 사형을 당하는 등 상왕복위사건으로 단종대왕이 노산군으로 강봉 되자 정순왕후도 노산군부인으로 내려졌다.
단종은 문종의 외아들로 세종23년(1441년)에 태어나 12세인 1452년 조선 제6대 임금에 올랐으나, 즉위 3년 만에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상왕 위에 있던 중, 동년 6월22일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 청령포로 유배 되었다가 1457년 10월24일 17세 되던 해에 관풍헌에서 세조의 사약을 받고 승하하셨다.
단종이 승하하셨을 때 시신을 치우는 이가 없자, 영월 호장(戶長) 엄홍도가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입는 것은 달게 받겠다”는 충정으로 옥체를 거두어 밀장을 하였으며, 중종11년 노산묘를 찾으라는 왕명과, 중종36년 당시 영월군수 박충원의 현몽에 따라 노산묘를 찾고 수축봉제(修築奉際)하여 모신 곳이 바로 장릉(莊陵)이다.
단종대왕의 애끓는 한과
시대를 풍자한 김삿갓의 멋 어우러져
그로부터 400여년 후 영월은 방랑시인 김삿갓이 숨어살던 은둔의 고장으로 다시 한 번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방랑시인 김삿갓. 짙은 해학과 풍자를 담은 시들을 비롯, 기이한 행동으로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옳은 것 옳다 하고 그른 것 그르다 함이 꼭 옳진 않고 / 그른 것 옳다 하고 옳은 것 그르다 해도 옳지 않은 건 아닐세.
그른 것 옳다 하고 옳은 것 그르다 함, 이것이 그른 것은 아니고 / 옳은 것 옳다 하고 그른 것 그르다 함, 이것이 시비일세.
是是非非非是是 是非非是非非是
(시시비비비시시 시비비시비비시)
是非非是是非非 是是非非是是非
(시비비시시비비 시시비비시시비)
그는 이름이 병연(炳淵), 호는 난고(蘭皐)지만, 세상 사람들은 삿갓을 쓰고 다니는 그의 모습을 보고 ‘삿갓’이라 불렀고, 어느만큼 인정을 나눈 사이에서는 성(姓)인 ‘김’을 붙여 ‘김삿갓’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김삿갓’이란 뜻인 ‘김립(金笠)’으로 주로 표기했다.
1807년(순조7년) 3월에 경기도 양주군의 북한강이 가까운 곳에서 태어났으며, 5세 때인 1812년 12월 서북지방(평안도)의 청천강 북쪽 지역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이 그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조정의 서북지방에 대한 차별에 반발하고 관리들의 수탈과 학정에 저항해 일어난 이 난은, 단 10일 만에 청천강 북쪽지역의 8개 군현을 장악해 버릴 정도로 백성들의 큰 호응과 적극적인 참여가 있는 정도였다.
이때 공교롭게도 김삿갓의 할아버지인 김익순은 그 8개 군현 가운데 하나인 선천군의 부사 겸 방어사로 있었다. 김익순은 일단 난군에게 항복하였다가 탈출했다. 그러나 항복한 뒤에 난군을 위해 협력하고 탈출한 뒤에는 남의 공을 가로챘다는 이유로 대역죄를 받아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했다.
세월이 흘러 이런 집안 내력을 모르고 영월에 숨어살던 김삿갓은 20세 되는 해에 영월 동헌 향시에서 장원급제를 하였으나 그 내용이 조부 김익순을 욕되게 한 시(詩)로 하늘을 볼 수 없다 하여 삿갓을 쓰고 방랑생활을 시작하였으며 풍자와 해학이 가득찬 시로 애달픈 민초들의 마음을 달래었다.
1863년 그의 나이 쉰일곱, 전라도 땅에서 눈을 감음으로써 아웃사이더로 살아온 일생을 마감하고 아들 익균이 유해를 영월로 옮겨 장사 지낸다. 김삿갓의 묘소는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노루목에 위치하고 있다.
그의 시는 해학과 서정, 관조적 허무와 격물정신으로 규정된다. 부정과 불의에 부딪치면 해학은 풍자와 조소의 칼이 되고, 절경과 가인을 만나면 서정은 술이 되고 노래가 된다. 또한 인생을 살필 때는 눈물이 되고 한숨이 되지만, 사물들을 앞에 두었을 때는 햇살이 되고 바람이 된다.
김삿갓은 1천여 편의 시를 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현재까지 456편의 시를 찾았다. 그가 현대인에게도 익숙한 사람이 된 것은, 구전으로만 전해 오던 이야기들을, 그것도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면서 꽃잎처럼 낙엽처럼 날려버린 시들을 이응수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모으고 정리하여, 비로소 그가 죽은 지 76년만인 1939년에 김병연의 첫 시집인 ‘김립 시집’을 엮어 냈기 때문이다.
○○○는 그 위를 삼키고
△△△는 그 아래를 삼키네,
위와 아래가 같지 않지만
그 맛은 한가지 일세.
○○○는 그 둘을 삼키고
△△△는 그 하나를 삼키네,
하나와 둘이 같지 않지만
그 맛은 한가지 일세.
○○○는 그 단 곳을 삼키고
△△△는 그 신 곳을 삼키네,
달고 신 것이 같지 않지만
그 맛은 한가지 일세.
父嚥其上 婦嚥其下 (부연기상 부연기하)
上下不同 其味卽同 (상하부동 기미즉동)
父嚥其二 婦嚥其一 (부연기이 부연기일)
一二不同 其味卽同 (일이부동 기미즉동)
父嚥其甘 婦嚥其酸 (부연기감 부연기산)
甘酸不同 其味卽同 (감산부동 기미즉동)
-嚥乳章 三章 (연유장 삼장)-
* 어느 선비의 집에 갔는데 그가 “우리 집 며느리가 유종(乳腫)으로 젖을 앓기 때문에 젖에 난 종기를 좀 빨아주어야 하겠소” 라고 했다. 김삿갓이 망할 놈의 양반이 예의도 잘 지킨다고 분개하면서 이 시를 지었다는 것이다 *
그는 5세 때부터 이곳저곳으로 피해 살아야 했고, 청년기 이후에는 방랑생활로 일관했기 때문에 생애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어 대부분을 추정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점 때문에 그가 남긴 시와 일화들이 더욱 신비로우며 흥미롭고 감동적으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지도 모른다.
<최호철 / 본지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