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섹시’ 코드에만 매몰될 것인가-박혁종

가로수가 앙상하다. 한주 내내 한파 속의 하늘은 참 맑다. 사물마다 각자의 생김대로 아름다웠던 자태가 생장과 소멸이라는 자연의 법칙 속에서 올 해도 어김없이 한 해를 되풀이하며 끝을 맺고 있음이다.
봄인가 싶더니 어느 사이 빈 나무들이 가득 한 가로수길거리는 아집을 벗어버리고 서로 나누고 소통하는 것 같아서 좋기는 한데 왠지 서글퍼지는 마음이 눈가를 촉촉이 적시지만 이대로의 감정도 괜찮을 만큼 개운하다. 버스 정류장 옆 담벼락을 넘어가는 담쟁이의 남은 잎들도 태연한 체 붉어진 낯으로 겨울의 책장을 급히 넘기고 있다.
비를 맞고 바람을 견디며 뿌리째 엉키기도 했을 담쟁이의 한 해, 지나가는 행인의 알 수 없는 속 깊은 눈물과 버스시간이 늦어 동동거렸을 누군가의 급한 여정도 맨발로 따라갔을 것이다. 나비가 앉았다 간 자리에서는 영영 만나지 못할 이별을 배웠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모두가 한 해 동안 짓고 만들었던 허물은 얼마만큼의 깊이로 뿌리를 뻗어 두꺼운 벽을 만들어 넘고 있을까? 입과 혀에서 나온 말의 상처는 얼마나 깊이 마음속으로 파고들어 샘이 되고 있을까?
그 말이 귀에서 죽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어디론가 가고 있던 자동차를 잠시 멈추고 차창 열어 눈부신 햇살을 맞으며 혼자 우두커니 상념에 잠겨본다. 스스로의 반성과 화해 없이 그저 삶의 길이랍시고 앞으로만 가고 있지는 않았는지, 제대로 실행하지 못하고 말만 앞세운 계획들은 없었는지. 풀 한 포기, 개미새끼 한 마리라고 쓸데없이 함부로 짓밟고 뽑지는 않았는지 하나씩 되새겨 본다.
모든 일이 부족한 성찰로 귀결될 한해겠지만 올 해가 가기 전에 사소한 다툼의 기미가 됐던 일이나 서운함을 남겼던 사람들에게 이해나 용서 구하는 일부터 먼저 해야겠다. 생로병사나 생장과 소멸의 변화는 사람만이 아닐 것이다. 만물은 무성하지만 각기 그 뿌리로 되돌아간다. “뿌리로 되돌아가는 것을 일러 고요함이라(1X
: �”이라고 노자는 말했다. 새로운 만남과 숱한 이별의 지점 12월 달력 속에 남은 날짜를 검게 동그라미 칠해놓고 지난 한 해의 나를 냉 차게 돌려보내며 고요한 시간의 처음으로 돌아가 나를 한 그루의 나무로 새롭게 심어야겠다.
그것은 깊은 고요 속에도 땅을 뒤흔드는 파도 소리가 있다면 땅을 뒤흔드는 파도 소리 속에도 깊은 고요가 자리하고 있을 것 같아서다. 그렇다면 땅을 뒤흔드는 파도 소리 속에서 뒤흔들리는 것이 세상살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서도 깊은 고요를 응시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그 고요 위에서 사물을 대하고 뜻을 내려고 노력한다면 그 가운데서 파도도 잦아들고, 소들도 싸움을 멈출 것이다.
“눈앞의 영화와 쾌락 때문에 자신을 망치는 사람들은, 죽을 줄 알면서도 욕망을 참지 못하고 두꺼비를 잡아먹는 도깨비와 다름없다” 필자가 어릴 적에 들은 얘긴데, 도깨비는 식성이 두꺼비를 엄청 좋아하지만 두꺼비를 먹으면 죽는다고 한다. 그래서 두꺼비를 볼 때마다 울면서 잡아먹고, 먹고 나서 죽는다는 것이다. 처음 들었을 때는 크게 웃으면서 생각하기를 ‘먹는 것이 좋기로 과연 그 목숨과 바꿀 정도란 말인가’ 라고 의아했지만 세상에 던진 이 한 마디는 당시 뿐 아니라 오늘날 필자에게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이는 현대 사회의 은애하는 방식은 상대의 가치가 아니라 상품으로 접근한다. 상품은 낡아 그 효용성이 없어지면 버려지고 만다.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그 시간은 점차 단축된다. 온갖 상품들 속에서 ‘섹시’한 코드만 만나느라 지쳐가고, 가치를 매기는 일 자체가 점점 사라지는 듯하다. 인간에게 가치가 매겨진다는 말은 반대로 가치가 없어질 수도 있다는 말이 되지 않을까? 모두 ‘섹시’한 상품에만 파묻혀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가치의 욕심으로 두꺼비를 잡아먹는다면 그 값을 치른 셈이지만 상품으로 먹어치워진다면 의미 없는 죽음이 될 것 같다.
옛 성현의 말을 빌면 “바보도 죽으면 썩고 총명한 이도 썩으니 흙덩어리로 누구누구를 어이 분간하겠는가. 흙 담처럼 쌓아 올린 담장처럼 하찮은 책 몇 권이 내 죽은 천년 뒤에 나를 증명하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차가운 평온이 하늘을 뒤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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