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시론] 내가 그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박혁종  본지 논설위원
박혁종 본지 대표

엊그제 속초를 대표하는 설악항, 대포항, 외옹치항, 동명항, 장사항. 5곳 중 속초 8경의 한 곳인 설악항 횟집에서 그토록 보고 싶었던 속초 모 어린이 집 원장님과 어둑해진 포장마차 안에서 소주잔을 나누며 항내의 풍경도 어우러져 제법 운치 있는 겨울밤을 보냈다. 원장님은 한잔 술로 버티기에 들어갔고, 두어 병의 소주는 필자가 거의 비웠다.
원장님과 만나기 전 설악항에서 바라본 붉게 물든 노을에서 ‘하피첩’이 생각났다. 다산 정약용이 1801년 강진으로 유배 간 지 10년 되던 해 그 부인 홍씨가 시집올 때 입었던 다홍치마 다섯 폭을 남편 다산에게 전한 것으로, 오랜 세월 빛이 바래 노을빛 같다고 해서 ‘노을 하(霞)’ 자로 표현한 것이다.
이날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포장집의 백열전등 탓인지 한잔 술기운이 올라서인지 원장님의 얼굴색이 수평선 너머로 저물어가는 노을 같아 다산의 하피집처럼 참 고왔다.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
“산승이 날짜를 꼽을 줄은 몰라도, 한 잎 지면 천하에 가을 옴은 안다네(山僧不解數甲子,一葉落知天下秋)”란 구절있다. 여름철의 비바람을 끄덕 않고 다 견딘 오동잎도 새로 돋는 겨울 기운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처음 한 잎이 떨어지는 것을 신호로 온 나무의 잎이 일제히 맥을 놓고 낙하한다. 덧없는 한 꿈을 깨고 나면, 스러져 뉘 다시 살아 있을까. 잎 하나 지니 가을에 이어 겨울이 아닌가. 아직 떨치지 못한 미망(迷妄)이 남았거든 더 늦기 전에 털어내야겠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이 실존하더라도 부르는 이름이 없으면 그것은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나아가 그 사물, 현상의 존재를 인식하기조차 어렵다.
김춘수 님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고 노래했다. 의미 없는 몸짓이던 ‘그것’,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던 ‘그’가,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꽃’이 되고 나와 교감할 수 있는 ‘너’가 되어 나에게로 올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원장님을 이00 이라고 부를 것이다.
인생의 모든 계절을 거쳐 마지막 끝자락에 처하여 있다. 계절은 겨울이 지나면 봄날이 다시 오지만 인생이야 겨울이 지나면 그렇게 그냥 끝나고 마는 것임을 어찌 모르겠는가. 새 하늘을 알리는 닭소리를 들으며 희망찬 미래가 생각되기보다는 내 생의 끝자락이 어디까지인가를 먼저 더듬어보게 된다. 인생의 삶이 그리 길지는 않다. 삶의 전체는 늘 순간순간 이별하는 것이다.
지구의 공전이 유지되는 한, 겨울이 지나면 어김없이 봄이 올 것이다.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나는 그 봄을 맞이할 것이다. 그러나 무심코 맞이하는 나의 봄이 누군가에게는 이제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생의 마지막 봄일 수 있고, 어쩌면 필자의 마지막 봄날일지도 모를 일이다.
따라서 예로부터 이 세상에 빚이 없는 사람은 없다. 성현은 가르침을 세워 세상에 드리우는 것이 빚이고 학자는 옛 성인을 위하여 끊어진 학을 잇는 것이 빚이며,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빚이다. 빚이 없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 쓸모없는 존재인 것 같다. 빚이 없기를 바라지 말고 그저 빚을 갚기만을 바라며, 빚이 있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그저 빚이 없는 사람이 될까 염려할 뿐이다. 저는 마음속에 빚 문서가 수북이 쌓여 있는데 아직 한 푼도 청산하지 못하여 늘 개탄하고 있다.
비록 빚 갚기에 바빠 살기가 팍팍한 현실이지만 자신의 책무를 다하는 근원적인 빚과 마음의 빚을 서로서로 갚아가는 행복한 우리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우리는 모든 애정과 관심을 내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쏟아 붓고, 울타리 밖의 사람들과는 가벼운 대화를 하는 것조차 어색해한다. 그래서 결혼식이나 장례식장에 가기 전에 친구들이 몇 시에 오는지를 확인하고서야 출발한다. 혼자 앉아 앞에 놓인 컵만 바라보고 있는 장면이 상상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우리’와 ‘남’ 간의 심리적 벽을 이토록 높이 세워 놓고 살까? 어쩌면 그것은 대부분의 타인을 잠재적 친구나 동반자보다는 경쟁자 혹은 감시자로 생각하는 구도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깊어가는 겨울밤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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