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연(蓮)을 사랑하나니 연꽃은 진흙 속에서 났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은 물결에 씻기어도 요염하지 않으며 속이 비고 밖이 곧으며 덩굴지지 않고 가지도 없다. 향기는 멀리 갈수록 맑으며 우뚝 서 있는 모습은 멀리서 보아야 참맛을 느끼게 하니 연은 꽃 가운데 군자(花中君子)이다. “송나라 때 유학자인 주돈이의 애련설이다.
삼척에서 태백으로 가는 길목 산양리, 가곡천 옆으로 지나는 416번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세계유기농수산 연구소가 가꾸어 놓은 연꽃 농장이 있다.
조금 미안한 마음이지만, 7~8월에는 이곳을 자주 찾았다. 누구에게나 개방돼 있는 농원에 들어가는 것이 뭐가 미안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연꽃 농장을 가꾸어 놓은 관리인들의 노고와 수고에 가져간 시원한 냉커피 한잔 대접해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입구부터 놓여 있는 흐드러진 연꽃을 구경하러 가는 것 같아 못내 미안한 마음이다.
8월 가곡은, 연꽃들의 자체 축제가 한창이다. 더욱이 저녁에는 사람들도 많지 않아 꽃대를 끌어당겨 향기를 맡는 나만의 즐거움도 조용히 누릴 수가 있다.
생각해 보면, 연꽃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즐기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사찰에 가면 여기저기에 빠지지 않고 있는 것이 연꽃이다. 물론 불상의 광배나 대좌 장식으로 표현된 연꽃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연꽃을 그저 보는, 분석하는 대상이라고만 여기는 버릇이 생긴 것 같다.
연꽃이라고 하면, 누구나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라고 생각한다. 주지하다시피, 불가에서는 더러운 곳에 처해 있어도 맑음을 잃지 않는다는 ‘처렴상정(處染常淨)’을 연꽃의 성품에 비유한다. 사실 연꽃은 불교의 꽃이 되기 훨씬 전부터 서양 고대 사람들이 ‘생명 탄생’이나 ‘태양’과 ‘희망’의 꽃으로 여겨 왔다. 일부 학자들은 생명 탄생과 관련되는 이 꽃을 불가에서 차용한 것이라고도 한다.
연꽃은 이제 불교의 대표적인 꽃이 됐지만, 과거엔 유가에서도 소중한 꽃으로 생각했다. 유학자들은 연꽃이야말로 군자의 상징이라고 여겼다.
글 첫머리에서 소개한 ‘애련설(愛蓮說)’이라는 시는 이러한 생각을 가장 잘 보여준다.
실제로 연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군자향’을 노래했던 주돈이의 시가 구구절절 가슴에 와 닿는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도 ‘애련설’의 영향으로 애련지(愛蓮池)나 애련정(愛蓮亭)이 여러 곳에 만들어졌는데, 조선시대 숙종 18년(1692)에 조성한 창덕궁(昌德宮)의 애련지와 애련정이 대표적인 예다.
주돈이의 시를 음미하면서 연꽃과 그 자태를 감상하다 보면, 시선은 이내 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독특한 형태의 연잎으로 옮겨 와 있다. 비가 오면, 연잎에 물이 가득차지만 잎사귀가 찢어지지 않는 것은 감당하지 못할 물을 미련 없이 비워버리기 때문이라는 어느 시인의 시구가 동시에 떠오른다.
연꽃은 진흙탕에서 자라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으며, 주변의 부조리와 환경에 물들지 않고 연꽃잎에 한 방울의 오물도 머무르지 않는다. 물방울이 지나간 자리에 그 어떤 흔적도 남지 않는다.
연꽃이 피면 물속의 시궁창 냄새는 사라지고 향기가 연못에 가득하다. 또 바닥에 오물이 즐비해도 그 오물에 뿌리를 내린 연꽃의 줄기와 잎은 청정함을 잃지 않는다. 연꽃의 모양은 둥글고 원만하여 보고 있으면 마음이 절로 온화해지고 즐거워진다. 연꽃의 줄기는 부드럽고 유연해서 좀처럼 바람이나 충격에 부러지지 않는다.
연꽃이 시궁창 속에서 피어나면서도 시궁창 물에 연잎이 더러워 지지 않듯이 연꽃처럼 피어나서 열매를 맺고 시절을 쫓아 져버리는 시대의 인재가 그립다.
연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계절이다. 이제 연꽃을 그저 바라보고 분석하는 필자의 오래된 습관을 버려야겠다. 맑은 향기 내뿜는 연꽃을 보며 군자향도 느껴보고, 물을 비워낼 줄 아는 연잎을 보면서 지나친 욕심과 집착을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정말 연꽃을 사랑하고 있는 본래의 우리들을 보게 된다.
[복지시론]연꽃 이야기 -박혁종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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