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시] 빗길을 걸으며

이영춘

빗길을 걷는다 걷는 발자국마다 채이는 생각의 알갱이들,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낮은 것들이 내 눈길 끌어 당기는
생각의 알갱이들,

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름 없는 풀꽃들, 풀꽃의 이름들
비는 주룩주룩 내리는데

함지박에 푸성귀 몇 다발 얹어놓고
풀잎 같은 할머니들이 풀잎처럼 앉아 있다

빌딩의 모서리 발밑에서 혹은 남의 집 담벼락 끝에서
비는 주룩주룩 내리는데

학교에서 돌아올 손자의 해진 양말을 생각하거나
집 떠나간 며느리를 원망하거나
알 수 없는 빗물의 내력,

맨바닥이 내 집 단칸 셋방보다 더 편안할 수도 있는 저 풀꽃들,
비는 주룩주룩 내리는데,

배추 몇 포기, 도라지 몇 뿌리, 토란 몇 알갱이가 그네들 목숨이 되는
목숨들이 하루를 노랗게 물들이고 있다

함지박에 빗물은 고이는데, 고여 흐르는데
빗물이 그네들의 목숨이라면
세상을 허물고 세우는 일도 그네들 함지박 속 빗물 같은 것,

빗길을 걷는다 걷는 발자국마다 질퍽하게 젖은 얼굴들이
내 발자국에 감긴다
비는 주룩주룩 내리는데

·이 영 춘
·평창봉평 출생
·전 원주여고 교장
·한국시인협회 심의위원 겸 감사
·강원장애인복지신문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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